[2019.03.21] 71년 만의 기회

[2019.03.21] 71년 만의 기회

연어입니다. 방금 저녁 뉴스를 보시던 어머니의 얘기를 전해듣고는 만감이 교차하였습니다. 오늘 법원에서 ‘여순사건’ 희생자에 대한 재심이 71년만에 열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렸나 봅니다. 예전에 이곳 스팀잇에 여순사건의 가장 큰 희생자였던 제 친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던 적이 있었지요. 여순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등등… 제주 4.3과 더불어 어떻게 이름 불러야 할지도차 정치적 쟁점에 서있는..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에 있어 가장 슬픈 비극중에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71년이 지난 지금껏 진실이 규명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겠습니다.

저는 이 글을 빌어 여순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정치적 쟁점을 얘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여순 사건을 이해하는 것 부터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엔 제주 4.3과도 연결이 되어 있고, 무엇보다 당시 이승만 정권을 둘러싸고 팽팽했던 좌우익, 친일 등등이 모두 얽혀버린 현대사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헌데, 저희 할아버지를 둘러싼 사건들이야 말로 작게 보면 한 집안의 비극이고, 크게 보면 통탄할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압축판이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어떤 역사 학자분께서 저희 집안을 무대로 역사소설을 쓰고 있다는 얘기가 전혀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닐겁니다. 어떨 때는 제가 이참에 소설 하나 써버릴까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대개의 여순사건 관련 희생자분들이 그러하듯, 저희 할아버지와 관련된 내용들도 대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늘 의문을 품고 여러 정황상 추정해 본 바가 있었는데, 몇 년전 상해에 거주할 당시 돌아가신 친할머니의 장례 때 친척이신 어느 분으로 부터 제가 추측했던 것과 매우 부합한 얘기들을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분이 아마 TV 뉴스속 화면에 나오셨나 봅니다. 어쨌거나 저의 아버지를 기준으로 얘기를 한 번 풀어가 볼까 합니다..


아버지를 기준으로.. 저의 할아버지 집안은 여수, 할머지 집안은 순천이었나 봅니다. ‘여순’이 여수와 순천의 준말이니.. 그야말로 타이틀 부터가 남의 얘기가 아닌거였죠. (근방에 거주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여수와 순천은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집안은 벼슬생활을 거하게 하셨던 조상님 덕분에 비교적 풍요롭게 터전을 잡고 살아왔던 씨족 집안이었습니다.

반면에 할머니 집안은 순천에 경찰청장이었던 할머니의 오라버니 되시는 분 덕분에 권세 꽤나 잡고 있던 것 같습니다. 제 추측이 맞다면 아마 친일 전력이 있었겠지요. 일제 시대때 부터 이승만 정권하에 이르기까지 당시 경찰쪽이라면 군을 좌지우지 할 만큼의 권세가 있었으니까요. 결국 모양새로는 여수와 순천에 각각 가장 잘 나간다는 집안끼리 혼사를 맺은 셈이 됩니다. 뒷얘기지만 할아버지가 할머니와의 결혼을 그렇게나 싫어하셨다던데..

지역에서 꽤나 전통있는 집안의 똑똑한 장손이고 교직에 몸담고 있던 할아버지는 아마도 당대에 많은 지식인이 그러했듯 사회주의 운동이라던가 좌익운동에 빠져들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여러 정황들을 보았을 때 그렇지 않고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거든요. 뭔가 핵심적인 인물로 처형된 점, 이후 정부에서 권세 꽤나 누리신 할아버지 친구분들의 함구, 기타 여기에 적기 어려운 몇몇 내용들에 비춰볼 때 그러했을거란 저의 추정입니다. 이쯤되면 이 대한민국 땅에 또 ‘빨갱이’ 운운하는 얘기가 있겠지만, 뭐 저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해방 이후 혼란스럽던 대한민국 땅에 항일만 해도 빨갱이란 딱지를 붙이던 시절이었고, 지금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관로 평가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들이 얽혀있으니 말입니다.

어쨌거나 제주도에서 부터 불어닥친 여수-순천 일대의 혼돈 속에 그 일대는 쑥대밭이 되어버렸고, 할아버지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 어떤 인권도 행사하지 못한 채(하긴 그 당시에 그런 개념이나 있었을까 싶네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왜 잡혀들어가셨는지, 어떠한 판결을 받은 건지,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든 여순 사건의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어떤 자료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총칼을 들이미는 권력에 굴복해야 했던 많은 보통사람들과, 자신의 입신을 위해 오늘의 동지도 적으로 바꾸고 마는 지인들 속에서 갓 태어난 아이 하나 업고 여기저기 눈물로 할아버지를 찾아나섰을 할머니만 그저 떠오르네요. 제대로 면회 한 번 하지 못하고 두 분의 인연은 그냥 끝나고 말았다 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게.. 군이 주도하는 총부림 속에서 할아버지를 그나마 막아줄 수 있었던.. 최소한 죽음만은 피할 수 있게 해줄 권력이 있던 할머니의 오라버니마저 본인의 입지 때문이었는지 결국 할아버지를 외면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어차피 깨질 인연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잘 나가던 두 집안의 혼사로 이어진 인연이란게 참으로 부질없지요. 이후 할머니는 그 오라버니란 분의 강압아닌 강압으로 재혼을 하셨으니.. 사실 저나 제 아버지나 할머니를 많이 뵙지 못한건 그런 연유에 기인하였지요.

상해에 있을 때 할머니 부고를 듣고 어렵사리 비행기 표를 끊어 순천까지 왔을 때, 우연한 이유로 저희 집안의 슬픈 역사를 알게 되신 한 집안 어르신께서 저와 아버지를 붙잡고 펑펑 우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청년 시절 할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내막을 수소문하다 모든 것을 체념하신 아버지는 그저 모든 것은 다 순리대로 될거라며 가족들만 바라보고 사셨는데, 그래도 그 분이 오랜 기간 여기저기 얘기를 듣고 다니시며 알게 된 사실들을 저희에게 알려주었을 때 많은 부분 마음의 위로가 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손주된 입장을 떠나 대한민국 정부의 국민인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저 역사책이나 다큐멘터리가 아닌 직접적으로 관련된 집안의 한 후손으로서 이번 여순사건과 관련된 재심의 결과를 지켜볼 생각입니다. 진실은 규명되어야 할 것이고, 역사적 과오가 있다면 밝힐건 밝혀야겠지요. 일평생 할아버지의 모습을 기억조차 못하시는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71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 기회를 그냥 그렇게 넘기지는 않으려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FPvW6lxg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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