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어의 단상 : 저는 스팀잇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연어의 단상 : 저는 스팀잇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연어입니다. 6살 때 쯤 저희 집 화장실에는 ‘케산’이라는 만화책 두 권이 놓여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어릴 때부터 뭐든 읽는 것을 좋아했던 저를 배려해서 놓아 두신 것 같은데, 그 때부터 입대를 하기 전까지 저는 화장실에 들어갈 때 책을 꼭 들고가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초등학생 2학년 가을 무렵에 아버지께서 만화책 한 권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1982년 10월, 바로 ‘보물섬’ 창간호였습니다. 그 유명한 ‘둘리’ 만화도 보물섬에 연재되었죠. 보물섬은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어깨동무’보다 훨씬 두툼했기 때문에 어린 저는 보물섬에 꽂히고 말았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매 달 사 놓을 정도로 보물섬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보물섬 창간호로 부터 두 세달 쯤 후니까, 막 1983년으로 넘어갈 무렵일 겁니다. 당시 어린이용 연재 만화책에는 몇 몇 광고들이 삽입되어 있었는데 천체 망원경, RC 카, 리바트 가구 등 아이들이 보면 뻑~ 넘어가는 상품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헌데 왠 책 한 권이 광고로 올라와 있더군요. 기억이 가물거립니다만, 책 제목은 아마도..

‘쉽게 배우는 BASIC’

바로 어린이 수준으로 설명해 놓은 베이직 프로그래밍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막 초등학교 3학년으로 넘어가는 1983년 초였으니까 수퍼맨 같은 미국 영화에서나 간간히 보았던 컴퓨터란 물건이 책 표지 그림으로 떠 있었죠. 그 때 저는 주산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업계에서 실력파로 유명했던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컴퓨터란 바보상자(?)엔 현혹되지 말라고 주의를 주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반항을 했죠.

“아빠, 이 책 좀 사주세요.”

다음날 아버지께서 퇴근길에 저의 부탁대로 베이직 교재를 사오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우습기도 하지만, 저는 그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으니 컴퓨터 없이 컴퓨터 교재만으로 프로그래밍 공부를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어린이 수준에 맞춘 내용이었으니까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10 A = 1; 20 B = 2; 30 C = A + B; 40 PRINT C; RUN [ENTER] 3

아.. 진짜 3값이 나올까? 텍스트를 보며 어린 마음에 이런 코딩 결과가 얼마나 궁금했던지 모릅니다. 프로그래밍이 논리적 사고력이 필요한 것이니까 논리력 개발에는 도움이 되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머릿속으로만 프로그램을 짜야했고 그 결과를 추리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제게 컴퓨터가 없었고, 당시에는 컴퓨터 보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일 때라 주변 친구들도 딱지나 갖고 놀던 때였으니까요.

베이직이란게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서 몇 일만에 책 내용은 다 마스터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컴퓨터 자판을 직접 두들겨 보게 된 것은 거의 1년이 지났을 무렵, 우연히 이웃 동네 오락실에 들렸다가 컴퓨터(MSX) 두 대를 발견한거죠. 아직도 미스테리한 사건이지만, 오락실 사장님이 왜 그렇게 설치를 해 두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50원 짜리 동전을 넣으면 일반 컴퓨터 모드로 들어갈지 오락 프로그램을 바로 실행할지 결정할 수가 있었고, 저는 망설임 없이 컴퓨터 모드를 선택했죠. 네모난 커서가 나오고 (그 때 퍼스널 컴퓨터들은 커서가 네모였습니다. ㅎㅎ) 저는 드디어 프로그램을 짜 볼 수 있었습니다. (50원당 4분 사용 가능)

10 A = 1; (1 값을 A에 넣어라) 20 B = 2; (2값을 B에 넣어라) 30 C = A + B; (A와 B를 합친 값을 C에 넣어라) 40 PRINT C; (C 값을 출력하라)

그리고 RUN(실행) ! 두둥..

3

아.. 3이 나왔습니다. 진짜 3이 나왔어요 ㅠㅠ 커서는 깜빡이는데 저는 눈물이 나오려 했습니다. 이 3 값을 출력해 보려고 1년을 기다린건가요? 그 동안 머릿속에 짜 본 프로그램이 지금으로 치자면 A4지 2,000장은 됐을 겁니다. 어쨌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처음 짜 본 코딩 순간을 저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네요.

그 후로 종로 세운상가에 컴퓨터가 쌓여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주말-평일 가릴 것 없이 틈만 나면 찾아갔습니다. 1985년엔 마침 전철 3호선이 개통되어 종로로 가는 것이 더욱 편해졌고요. 참고로 당시 세운 상가에는 애플 컴퓨터가 주로 판매되고 있었고, 백화점에서는 일본 계열의 MSX 컴퓨터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삼보 트라이젬을 시작으로 퍼스널 컴퓨터(PC란 단어의 원조죠)들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할 때였죠. 5학년이 되니 집에 애플 컴퓨터가 있는 (부자!!!) 친구가 있었는데, 매일 그 친구 집에 살다피시 하면서 프로그래밍도 해보고 로드런너나 서머게임/윈터게임 같은걸 하며 놀았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쯤 저에게 @leesunmoo님 같은 분이 나타나셨는데, 아버지 회사 신입 직원으로 전자공학을 전공한 분이 오신겁니다. 제가 ‘삼촌’이라고 불렀던 그 분은 아버지의 술상무(?) 역할까지 하셨던 관계로 저희 집에 자주 들르곤 하셨는데, 한 번은 컴퓨터 잡지를 왕창 선물로 주시더군요. 그 중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창간호도 있었으니까, 상당히 전문적인 내용이 담겨있는 서적들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의 컴퓨터 탐독은 본격적으로 타올랐습니다. 어셈블리, 기계어.. 닥치는 대로 공부해 보았던 것 같아요.

어린 녀석의 열성이 대단해 보였는지 마침내 아버지께서는 6학년에 올라가는 저에게 컴퓨터를 한 대 장만(그때는 컴퓨터도 ‘장만’했다고 할만큼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지요)해 주셨습니다. 기종은 APPLE 2(+). 그 때부터 밤낮 없이 컴퓨터를 두들기고,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고.. 저의 모든 여가 시간과 용돈은 컴퓨터를 위해 쏟았던 것 같네요. 86년도에 모뎀이란 것을 알게 되어 설치 문의하러 전화국까지 가보았던 기억도 납니다.

지금도 당시 초등학교 동창들이 제게 준 성탄카드를 보면 ‘컴퓨터 더 열심히 해서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덕담들이 적혀있을 정도이니 나름 그 열성이 꽤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열성도 중학교 2학년에 들어가면서 식어버렸죠. 어느 주말에 평소처럼 컴퓨터를 만지작 거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맨날 이렇게 컴퓨터만 하니 내 용돈도 많이 깨지고 다른 것 할 시간도 없쟎아!”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 날 컴퓨터는 수건으로 덮어 놓고, 벽 한 면을 차지하던 보물섬도 다 내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시작했느냐? 아니요, 그냥 기타를 잡았습니다. 그 때부터 입대할 때까지 기타에 빠져 살았으니까.. 저의 컴퓨터 사랑은 그 날로 종쳤던 겁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88년 올림픽 이후에 PC의 가격이 급격히 떨어지고 반대로 성능은 일취월장하기 시작합니다. 386, 486 들이 속속들이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전 오히려 손을 놓아 버렸죠. 어찌하여 공대에 들어갔지만, 공대 공부가 싫었던 저는 여전히 컴퓨터를 멀리하였습니다. 억지로 유닉스 수업을 듣긴 했지만 관심도 없었고요. 남들보다 한참은 앞섰던 위치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세상 흐름에 역행했던 거지요. 하하.

입대 후 자대 배치를 받고, 제가 근무할 부서로 들어갔는데 고참들이 묻는 겁니다.

“너 컴퓨터 좀 해?” “아닙니다. 잘 못 합니다” “신병 자료 보니까 공대 다니다 왔던데?” “컴퓨터는 잘 모릅니다” “에라, 쒸..” “시정하겠습니다”

결국 시대 흐름과 더 이상 멀어지지 않기 위해 자판을 잡은건 정작 군대에 들어가고 나서였으니, 저도 참 아이러니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의 컴퓨터 실력은? 그냥 일반인 수준일 겁니다. 지금이야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자기 일하는 분야에서 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는 많은 유틸리티들이 있고, 인터넷을 통해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으니까 딱히 불편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예전 한 때 IT열풍이 불었을 때.. 내가 만약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전산을 계속해 왔다면 이 기회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블록체인 세상이 열리고 있는 지금, 저는 블록체인의 선구자 그룹에 있거나 전문적인 일을 맡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블록체인에 기반한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도 아니죠. 그냥 코인 투자를 좀 즐기고 꾸준히 (게으름도 많이 피우지만요) 스팀잇에 글이나 올리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스팀잇을 탐독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스팀잇 자체도 공부할 거리지만 시시각각 올라오는 컨텐츠 만으로도 저는 세상의 흐름을 많이 캐치할 수 있습니다.

스팀잇이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잘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많은 근거들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들은 대개 스팀잇을 호의적으로 보시는 분들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스팀잇을 잡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지 않나 합니다. 저같은 평범한 유저 입장에서 볼 때 스팀잇을 놓아버리면 결과적으로 코인 시장은 물론 블록체인 자체에 대한 관심을 놓아버릴 것 같습니다.

제가 스티브 잡스를 처음 알았던 것은 1983년이었습니다. 하지만 2011년 그가 사망할 때 까지 약 30년 동안 저는 잡스 같은 사람들이 열었던 세상 흐름과 따로 놀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블록체인 세상이 열리고 있습니다. 제 어릴적 경험에 비유한다면 이제 막 퍼스널 컴퓨터란 것이 알려지기 시작할 때입니다. 본격적인 보급은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스팀잇이 MS 윈도 같은 역할을 할지 그냥 역사 속으로 묻혀 버릴지는 정말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관심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고, 적어도 스팀잇을 쥐고 간다면 역사적인 흐름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그 때 가서 어떤 결정을 내릴 지 역시 잘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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