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어의 단상 : KR, 씨앗을 키우다

연어의 단상 : KR, 씨앗을 키우다

연어입니다. 문득, 고등학교 1학년 때 한참 해외 펜팔에 빠져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펜팔은 당시 학생 신분으로서 해외 친구와 소통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전 동갑내기 네덜란드 여학생과 꽤 오랜기간 서신을 나눴는데, 어머니께서 ‘이러다 외국인 며느리를 맞이할 수도 있겠구나’ 하며 내심 각오를 하고 계실 정도였습니다. 편지 한 번 보내면 넉넉잡고 2주는 기다려야 답장을 받아 볼 수 있었으니 편지 한 통 보내는데 일주일은 걸리던 시절이네요. 엊그제만 해도 비트코인 전송이 너무 오래걸린다고 혼자 투덜대고 있었는데.. 참 세상이 많이 변하긴 변했나 봅니다.

어쨌든.. 그러던 차에,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대표팀은 당대 최고의 성적을 올리며 예선을 통과한 상황이었고, 때마침 최순호와 김주성 등 아시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타들이 전성기를 맞이하는 시점이었습니다. 스포츠 신문들은 연일 축구 대표팀의 일거수 일투족을 취재하며 ‘월드컵 최대 다크호스는 바로 꼬레아!’라는 해외 언론의 언급을 특종 보도하던 분위기였죠. (지금 생각해 보니 한국 기자들의 애국심 고취용 자화자찬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요? 한참 피끓던 나이의 저는, 제가 가장 사랑했던 스타! 그라운드의 야생마! 김주성 선수가 팀을 이끈다는 사실 만으로도 급 흥분했던 차였습니다. 그런 제가 가만이나 있었겠습니까? 연일 펜팔에 글을 도배질하기 시작했지요.

“친구야 기다려라! 아시아의 축구를 알리러 한국 대표팀이 간다!” “아무래도 네덜란드와 한국, 8강 쯤에서 맞붙을 거 같다. 우리가 이기면 미안해서 어쩌지?”

그. 러. 나. 결과는 다들 아시겠지요? 네, 3전 전패였습니다. ‘황보 관’ 선수가 캐논슛 한방을 보여주긴 했지만, 한국팀은 경기마다 힘 한 번 못 써보고 끌려다니며 세계 무대와의 격차를 또 한 번 인정해야 했습니다. 고맙게도(?) 제 친구는 그런 결과를 모르는 척 함구해 주더군요. 하지만 얄밉게도 제가 친구에게 연결해준 다른 네덜란드 여자애가 편지에 이렇게 썼더군요.

“한국의 세 경기 다 봤는데, 다 졌더라? 그래도 마지막 슛 한 방은 시원했어”

아 놔..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스포츠에서 몇 경기 지는거야 당연할 수 있지만, 그 동안 대표팀의 실력을 과신하고 언론 플레이에 장단을 맞춰왔던 제 자신이 어찌나 부끄럽던지요. 그리고 마치 운과 투혼만 좀 따라주면 우승이라도 할 것 처럼 대표팀의 실력을 극찬하던 언론들은 왜 한순간 태도를 싹 바꿔 한국팀을 뭉개기 시작하는지..

당시에 저의 충격은 너무나 컸습니다. ‘우물안 개구리’였으니까요. 그리고 우승팀 서독과 피터지는 혈투를 벌였던 네덜란드 팀의 월등한 실력을 보면서 내심 부럽고 부끄럽기만 하더군요. 어쨌든, 저의 설레발에 친구가 보여줬던 겸손함은 정말 멋진 것이었고, 그런 겸손도 결국 힘과 실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 때 제대로 한 번 느꼈던 것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네덜란드 축구의 역사를 훑어보니 유럽 축구 강국들 사이에서도 그들이 늘 강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는 앞을 내다보며 오랜 기간 씨앗을 뿌렸던 역사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오늘 스팀잇에 들어와 보니 드디어 kr이 introduceyourself 태그를 누르고 4위에 등극했더군요. 수 많은 사람들이 스팀잇 가입 후 자신을 알리던 창구를 앞질러 버리다니. 혹시 쓸데없는 애국심으로 혼자 감동먹는 (일명 국뽕이라 하던가요?) 연어가 된 건 아니냐고 하시겠지만, 제가 가입했을 무렵 종종 랭킹이 밀려 화면 카테고리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랭킹에 보이기라도 하면 일출을 보는 것 마냥 반가워 하던 때가 엊그제 같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kr의 급성장에 몇몇 스티미언들이 의심과 질투의 눈길을 보이기 시작했던지 이를 반박하는 글들이 올라오며 설전을 벌이는 내용을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clayop 님의 영문글이었던 것 같은데, 제가 흥미롭게 본 것은 kr 태그를 중심으로 한 스팀파워의 규모와 비중에 대한 언급이었습니다. ‘kr’ tag의 부상은 단순히 한 국가 커뮤니티가 똘똘 뭉쳐 특정 태그를 마구마구 남발했기 때문이 아니라, 넉넉한 부와 강력한 컨텐츠로 무장한 kr 커뮤니티가 지속적인 활동을 벌인 결과라는 것이 글의 요지인 듯 했습니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컨텐츠로 무장한거야 익히 볼 수 있는 바이지만, 제가 주목한 부분은 바로 스팀파워를 꾸준히 키워온 kr의 저력이었습니다. 몇몇 웨스턴 고래급들이 파워다운으로 현금을 건져갈 때 kr은 되려 그 파워을 모아온 것이죠. 그리고 지속적인 투자를 감행해 왔습니다. 스팀의 미래를 보고 자신있게 지른 것이죠. 그리고 그 기대가 현실이 되도록 머리를 맞대고 커뮤니티를 활성화시켜 온 것 아닐까 합니다.

사실 저도 스팀파워를 지속적으로 키워온 1인입니다. 저라고 뭐 스팀달러로 소고기 사먹고 싶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오히려 고기 먹을 돈 아껴서(진짜? ㅋ) 스팀파워 차곡차곡 쌓아올린 제 입장에서는 그래도 반가운 뉴스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스팀달러로 소고기 사먹기도 해야 합니다. kr의 씨앗은 스팀파워에만 축적되어 있는 것이 아니죠. 스팀이 제공하는 모든 시스템을 잘 향유할 줄 아는 커뮤니티가 진짜 힘을 키울 수 있는 법이니까요. 소고기도 사먹고, 그 얘기도 들려주고, 보팅도 하고, 그래서 파워 생기면 파워 업도 해보고.. 돈이 돌고 돌아야 돈이듯이, 스팀도 돌고 돌아야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요.

요새 큐레이터를 비롯한 몇 몇 이슈들로 시끌벅적했었는데, 그것도 어찌보면 kr이 더 잘되어 가려고 그랬던 것 아닌가 합니다. 4위 등극한 kr 태그, 오늘은 살짝 감개무량해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kr은 분명 모범적인 커뮤니티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조금 시기와 질투를 받는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으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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