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려 (1)

격려 (1)

연어입니다. 중산층 시리즈를 재개하기 전에 ‘격려’라는 주제로 두 편의 포스팅을 올려볼까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중학교 1학년 초, 반장 선거에 나갔던 저는 4명 중 4등이라는 그야말로 참여에 의의를 둬야했나 싶을 초라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반장 선거에서 떨어질 수야 있는 일이지만 최저 득표라는 성적은 저로서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다음날 저를 교무실로 따로 부르신 담임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내 생각으론 어제 네 연설이 가장 내용이 좋았다. 의젓한 모습이었고, 중학생으로서 초등학생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시작한 네 논조도 매우 적절했지.”

제가 스스로 생각했던 부분과 같은 내용을 정확히 짚어주시다 보니 상당히 마음의 위안(?)이 되더군요. 그리고 선생님은 이런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네 학우들은 네 이야기에 아직 크게 동조를 하지 못했나보다. 함께 더 시간을 갖고 지내다 보면 친구들이 어떤 이유로 아직 네게 마음을 열지 못했는지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반장 선거 당일에 객관적인 투표 결과와 분위기로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것은 표의 분산이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세 명은 반에서 키가 매우 큰 쪽이었고, 반장으로 당선되었던 친구는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친구였지요. 학기 초에는 아무래도 짝이나 앞 뒤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 친구들과 빨리 친해지게 되니 저를 포함한 세명은 정치공학적(?)으로 볼 땐 표가 분산될 소지가 컸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헌데? 왜 하필 그 세 명 중에서도 제가 꼴찌였던걸까요?

저는 당시 가장 먼 거리, 그것도 최초로 그 중학교로 배정을 시작한 초등학교 출신이었던 것이 작용하지 않았나 추측했었습니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 말씀처럼 아이들과 한참 친해지고 나니 전혀 엉뚱한 이유를 한 가지 알게 되었죠.

“난 네가 반장 후보자들 중에 싸움도 제일 잘할거 같고, 애들을 후두려 패면서 잡지 않을까 걱정이 되더라고. 대충 앞에 앉은 애들 분위기는 그랬었어. 근데 지금 보니 넌 그런 애가 절대 아닌거 같다.”

저로써는 좀 쇼킹한 이야기였습니다. 의젓하고 신뢰감있게 보이겠다는 제 연설 태도가 되려 으름장 비슷하게 들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편으론 재밌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찔하더군요. 그때부터 각 상황마다 저의 의도에 부합한 인상과 태도를 전해주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사건이 저의 학창 시절에서 가장초라한 결과를 보인 반장선거였습니다.


고1 말 무렵이었습니다. 그날은 중2때 부터 공부를 핑계로 반장 선거에 나가지 않던 제게 새로운 동기가 부여된 날이었지요. 수업을 다 마치고 그 주의 청소 분단이었던 저는 의자를 올리며 청소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반장이던 녀석이 가방을 챙기며 교실 밖으로 나가려 하더군요.

“야, 너 어디가?” “수업 끝났쟎아. 집에 가야지” “너 청소 안해?” “내가 왜? 나 반장이쟎아?”

순간 저는 ‘빡’이 돌면서 동시에 어이가 없더군요. 그 녀석은 새삼스레 지금 와서 왠 딴지를 거냐는 표정으로 쓍 나가버리더군요. 가만 생각해 보니 저는 거의 학기가 다 끝나던 그때까지 그 친구와 같은 분단이었던 적이 없었던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반장이라는 특권으로 청소를 쌩까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던거죠. 당장이라도 녀석을 좇아가서 한소리 하고 잡아올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 친구의 마인드가 저의 권력욕(?)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던 셈이었습니다.

방학을 지나 고2가 되었고, 이주일쯤 지나니 반장선거일이 되었습니다. 반장 선거에 나설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에 저는 그 어는 때보다 비장한 각오로 앞에 나섰고, 그런 당당함 때문이었는지 가장 먼저 후보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앞에 말씀드렸던 고1 마지막 무렵의 일화를 짧막하게 이야기하며 연설을 시작하게 되었죠. 아랫글은 그 일화를 얘기한 후에 연설했던 대략적인 저의 논조입니다.


학우 여러분. 지금 말씀 드린 그 날 이후로 저는 오늘을 손꼽아 기다려 왔습니다. 그 친구를 탓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그 친구도 제가 보지 못한 어느 순간 어느 곳에서 반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자 노력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기억하는 사실은 반장으로서 1년이 다 되도록 친한 친구 일부를 빼고는 같은 반 친구들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점, 심지어 어떤 학우들은 같은 반인지 조차 헷갈려 했다는 점, 이런 모습이 제가 지켜보았던 한 반의 반장이란 친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이던 반장이 청소마저 회피하려 했을때 제가 느낌 감정은 그저 특권 의식이었을 뿐입니다.

저는 지난 1년 동안 반장이 해온 일을 기억해보니 그저 수업 시작할 때 인사 구령을 붙이던 일과 새 학기가 시작될 때 새 교과서를 나눠준 모습뿐이었습니다. 저는 한 학급을 대표하고 때른 지휘도 해야하는 반장의 역할이 이런 곳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장은 반장으로서 중요한 역할과 책무가 분명 있는 것이고 그런 일들을 감내하겠다면 거기에 걸맞은 태도와 자세를 늘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지금 여러분께 공약으로서 세 가지를 약속하려고 합니다.

첫 째, 제가 반장이 된다면 학우들의 전체 명단을 받는 그 다음날까지 여러분의 이름과 학급번호를 모두 외워놓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굳이 반장이 아니더라도 이 반의 일원이자 친구로서 저는 여러분 모두의 이름을 빠른 시간내에 완벽하게 외울 것입니다. 다만 반장의 책무로서 여러분의 번호까지 모두 외워 놓는 자세를 보여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그렇게 하면 저 또한 반장으로서 반 행정 업무를 신속하고 편하게 처리할 수 있을테니 그 또한 좋은 일일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반장으로서 여러분 모두 소중한 일원으로서 존재감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첫번째 약속입니다.

두번째로, 저는 반장이 되더라도 여러분과 동등한 위치로서 교실 청소에 빠짐 없이 임할 것입니다. 이것은 반장으로서 누리는 불합리한 특권을 내려 놓겠다는 공개적인 약속입니다. 만약 담임 선생님의 권유나 명령으로 다른 임무를 맡게 되며 청소 자체를 빠져야 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저는 직접 빗자루를 들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여러분과 함께 청소하는 자리에서 효율적이고 신속한 청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휘하고 감독하는 역할이라도 함께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학급의 공적인 자리가 비록 귀찮고 짜증나라도 대표자인 반장으로서 회피하지 않겠다는 여러분과의 약속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다른반 친구들에게 청소든 뭐든 빠지지 않고 함께하는 든든한 반장들 두었노라고 자신있게 말씀하셔도 될 것입니다.

셋째, 이제 우리 10반은 하나의 학급이자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아직 학기초인 만큼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많지만 빨리 서로를 좋은 방향으로 알아갈 수 있게 분위기를 이끌고 필요하다면 중재 역할도 맡겠습니다. 우리 남자들끼리니까 툭 까놓고 얘기하겠습니다. 우리중엔 싸움을 가장 잘하는, 애들 좀 괴롭혀 본 학우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친구도 우리 반에 대한 애정이 싹트고 소속감이 생긴다면 내부에서 서열을 확인하고 괴롭힘을 일삼는데 에너지를 쓰기보다는 우리반 학우들을 다른반 애들의 시비로 부터 지키고, 더 나아가 우리 학교 학생들이 다른 학교 학생들로 부터 위협 받지 않으며 어깨 펴고 다닐 수 있도록 힘써줄지 모릅니다. 결국 우리가 단결하고 마음을 나눠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나가다면 그 이상 반장으로서 보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작년에 제가 느꼈던 불만은 비단 저 혼자만의 불만은 아니었을겁니다. 우리 모두 종종 겪고도 그냥 넘겨야 했던 불합리한 기억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우리 10반의 반장으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며 그 속에서 학생으로서 신나게 공부도 하고 멋진 10대의 추억을 만들갈 수 있는지 좀 더 고민하고 실천새 나가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힘을 보태주십시오. 여러분에게 이렇게 약속합니다. 잘할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내일 올려 보겠습니다. 멋진 토요일 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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