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파산, 그리고 재기

세 번의 파산, 그리고 재기

상해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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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중국 상해에 발을 디뎠다. 이제부터는 몇 년간 이곳에 생활하며 현지 회사를 이끌어 가야 한다. 몇 번 오갔던 출장때보다 부담감은 몇 배이다. 무엇보다 타지에 정착하며 활로를 키워야 하고, 한국에서 닦아 온 거래 노하우로 중국 시장에서 전 세계 금융인들과 겨루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임무였고 청춘의 끝자락을 다시금 불살르고 싶은 타이밍이기도 했다.

상해는 우리의 생각보다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이다. 곳곳에 보이는 외국인 거주자들을 보니 괜히 국제 도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회사를 새로운 장소로 옮겼다. 이래저래 한국 사람은 좀처럼 볼 수 없는 곳이었다. 가까운 곳에 서양인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는 타운이 있어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불편 없이 채울 수 있었다. 중국인들의 영어 울렁증은 생각보다 심하다. 젊고 교육받은 사람들이 아니면 영어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부족한 중국어 실력으로는 세부적인 내용을 주고 받을 수 없었다. 사과야 살 수 있겠지만 핸드폰을 개통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이니까.

영어, 중국어, 번역 앱.. 게다가 도처에 깔려 있는 중국 친구들, 함께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상해에 정착한 중국인 직원 등..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이런 저런 도움을 받아가며 한 건 한 건 일을 해결해 나갔다. 그리고 틈틈이 맛집도 발굴해 나갔다. 외딴 곳에 혼자 지내며 먹는 재미라도 없으면 어쩌란 말인가. 이런 저런 식당과 거리 음식을 음미하며 알게 된 것은 상해에선 비싼 음식일수록 맛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를 감동케 한 음식들은 대개 서민들의 먹거리였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그들 말에 의하면 비싼 음식은 비싼 재료로 대충 만들어서 맛이 없고, 싼 음식은 저렴하고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로 최선을 다해 만들어서 맛있다고 한다. 나 또한 중국의 길거리 음식은 매우 비위생적이고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선입관이 있었지만 계속 지내다보니 이들이 만드는 음식은 오히려 믿을만 했다. 상해에는 사람 사는 곳에서 옹기종기 음식을 만들어 나누는 정서가 아직 남아있는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고부터 나는 서민들이 먹는 음식들을 맘껏 즐길 수 있었다. 늘 맥주 한 잔과 함께…

정말 우연히도 중국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에서 근무했던 조선족 출신 회계사를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인연은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다. 현지 부동산 직원과 집을 알아보던 중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서로 답답하긴 마찬가지었다. 다행히 남편이 영어를 좀 하는 듯해서 중간중간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며 집을 구하려 다녔다. 그러다 갑자기 어떤 건물 안에 한국말을 하는 사람을 본 것 같다면서 온 건물을 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방문한 곳은 일본인들이 근무하는 회사였다. 아노… 그러고 보니 나는 일본어도 잘 몰랐다. 다행히 중국인 직원 한 명이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 사무실을 안다고 얘기해 주었다. 우리는 그 사무실을 찾아갔다.

천만 다행으로 한국어에 능숙한.. 한 명은 완벽한 서울말을 쓰는..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조선족으로 추정되는 직원 두 명이 있는 회사였다. 그 중 한 명의 도움으로 부동산 직원과 서로 소통이 어려워 깊게 논의하지 못했던 일을 잘 풀 수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잠시 한국으로 귀국했다가 나머지 준비할 것을 상해로 챙겨왔다. 그리고 작은 선물을 들고 그 사무실로 인사를 갔다. 그런데 그 때 보았던 두 직원은 없었고 처음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이런저런 포스로 봐서는 관리자 급의 여자였다. 어차피 이 사무실은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는 곳이려니 하고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처음 보는 낮선 한국 남자라.. 그쪽에서도 살짝 놀라는 듯했다. 나는 이곳 직원들로 부터 큰 도움을 받았으며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하러 왔다고 말하며 선물을 주었다. 선물은 차(tea)였다. 한국 식이면 음료수나 과일 같은걸 사갔겠지만.. 중국엔 그런 문화가 없는지 선물로 들고 갈만한 음료나 포장된 과일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냥 중국이니까 차 정도면 무난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두어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 여자 분이 우리 사무실로 찾아왔다. 예의가 바르신 분 같다며 선물을 받기만 할 수 없단 얘기와 함께 선물을 내게 건네주었다. 먹는거였던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쨌든 그렇게 머나먼 타지에서 새로운 인연들을 키워갈 수 있었다.


혹시 상해에 정착하시면서 힘드 신 점은 없으신가요?

왠만한건 다 제가 해 나갈 수 있겠는데.. 회계사와 통역이 시급하네요.


이럴수가.. 천만 다행으로 그 분이 바로 회계사였다. 상해에 진출했던 한국 대기업의 회계팀에서 일을 했고, 미국계 회사에서 역시 높은 직급으로 회계 일은 맡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뜻하지 않게 늦은 임신을 하게 되어 휴직을 하였고.. 마침 출산 후 복직이 아닌 회계 사무소를 하나 운영하기 시작한 때였다.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심정이었다. 회사의 회계 파트 때문에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임 법인장의 비협조적인 인수인계 문제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고, 특히 회계 쪽에서 저질러 놓은 일처리를 뒷수습하려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벽한 중국어와 한국어가 가능한, 한국-중국-미국 회계에 모두 능통한 사람을 우연치 않은 기회로 알게 된 것이다. 그 분의 소개로 통역에 능숙한 직원을 소개받을 수 있었고, 당연지사 회사의 회계 업무 역시 아웃소싱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두 가지 사항이 한 번에 해결되니 나머지 일은 일사천리로 해나갈 수 있었다.

어느 저녁.. 평소처럼 양꼬치나 뜯으러 가던 중에 행상에서 과일을 파는 아저씨 한 분이 아이패드로 주식 챠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곳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 보다 더 모바일 기기에 친숙해 보였다. 웨이신(微信, wechat)과 알리페이(支付宝)로 연결된 거대한 나라.. 그것이 바로 중국이었다. 순간 나는 눈이 번쩍 뜨였고 부랴부랴 컴퓨터 앞에 앉아 중국 암호화폐 거래소를 찾아보게 되었다. 올커니.. 두 회사 검색되었다. 후오비(火币).. 그리고 나를 구렁텅이로 빠뜨린 오케이코인(OKcoin)이었다.

첫 번째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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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상해로 오기 전에 이미 비트코인 투자를 시작한 상황이었다. 블록체인의 미래에 매료되어 있었고, 투자 세계에 몸담고 있던 경력 때문인지 이게 돈이 되고 수익이 된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한국 거래소에서는 비트코인 정도만 거래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상장 종목이 달랑 비트코인 하나였기 때문이다. 헌데 중국 거래소들은 이미 라이트코인을 상장해 놓고 있었다. 엄밀히 얘기하자면 전 세계 라이트코인 대부분은 중국이 거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순간 나를 상해로 불러들인 것이 바로 라이트코인인 것 같았다. 역시 큰 무대는 이곳이었어..

나는 그렇게 휘파람을 불며 일단 한국 거래소에 갖고 있었던 비트코인의 절반을 새로 개설한 OKcoin 계정으로 옮겨 놓았다. 몇 일간 이런 저런 거래를 해보고 나서는 확신에 찬 심정으로 나머지 비트코인 절반도 모두 이체를 해 놓았다. 그리고 보유 물량의 절반 이상을 라이트코인으로 바꿔두었다. 당시 라이트코인은 매우 핫한 종목이었다. 비트코인의 움직임을 거의 복사한 것처럼 움직였는데.. 비트코인이 선물처럼 움직였다면 라이트코인은 옵션처럼 움직이던 때였다. 어차피 변동성이 큰 거래라면 더욱 큰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판단으로 포트폴리오의 절반 이상을 라이트코인에 분배해 두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때 매입한 라이트코인의 가격은 거의 껌값 수준이었다.

OKcoin 계정을 개설할 때는 거래자가 로컬에 거주하냐 아니면 해외에 거주하냐의 구분 방식이었다. 나는 비록 외국인이었지만 중국 내에 거주하고 있으므로 로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나는 통역을 해주는 분의 도움을 받아 가입을 마무리 하였다. 여권도 보내고.. 여러 인증을 거쳐 당당히 해외 거래소의 참여 일원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월급을 받거나 꽁돈이 생기는 족족이 물량을 매집하기 시작했다. 슬슬 승부가 시작되었다. 한국에 두었던 여러 자잘자잘한 자산들은 모두 처분해 물량을 늘여나갔다. 비트코인은 언젠가 비상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비트코인 뿐만 아니라 라이트코인도 날아갈 것이 자명했다. 나는 더욱 더 자산을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코인들의 상승을 꿈꾸던 상황에 여기저기 걸쳐있는 자산들은 오히려 발목잡는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매일 밤 연계 계좌 ATM 앞에서 위앤화를 입금했고, 나의 코인 물량들은 하루가 다르게 쌓여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날은 추석 연휴를 맞아 한국에 들어왔다 다시 상해로 들어오는 날이었다. 밤 늦게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있는데 부랴부랴 중국 선물사에 파견나와 있던 한국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이렇게 통화가 안 되냐고.. 나는 명절동안 한국에 다녀왔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몇 일 안되는 사이 리커창의 천청벽력과 같은 발표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한국 투자회사는 꺼지라는..

그런 발표였다. 5년에 걸쳐 준비하고 비상을 앞 둔 시점에서 터진 내용이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중국은 그런 나라였다. 국가 위에 당이 있는 나라. 공산당이 국가를 세운 나라. 공산당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은 국가의 법 위에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법 위에 있는 사람들이니.. 약속을 뒤집는 건 일도 아니었다. 중국 내 시장을 키우기 위해 이런저런 혜택과 조건들을 내세우며 선진화 된 외국 투자 회사들을 끌여들였고.. 그들과의 경쟁에서 판판이 깨지다가 조금씩 조금씩 그 노하우를 캐내어 온.. 그러다 슬슬 자신감이 붙을 무렵.. 이제는 되려 외국 자본과 회사들을 한 방에 밀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 처럼.. 돈은 두고 가라는 식이다. 중국에서 돈은 벌 수 있지만 번 돈은 가져가지 못한다는.. 그것이 그들의 상고방식이고 원칙이었던 것이다. 리커창은 말 한 두 마디로 수많은 외국 투자 회사들을 물 먹인 셈이었다.

애초에 홍콩, 싱가폴, 상해 중에 상해를 택한 이유는 발전 가능성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쌓아 올린 실력과 퍼포먼스를 앞이 창창한 상해에서 펼쳐보겠다는 오너의 판단이 있던 터였다. 물론 가장 리스크가 큰 것도 상해였다. 상해는 위험과 기회가 공존한 중국 대륙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급변했다. 계속 상해에 남을 것인가, 홍콩이나 싱가폴로 옮길 것인가.. 결국 우리는 철수를 선택했다. 그리고 철수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제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할 터였다..

하지만 내 코인들은 중국 거래소 계정에 있는 터였다. 라이트코인은 중국이 종주국이나 마찬가이였다. 라이트코인을 위해서라도 선뜻 한국 거래소로 옮겨 올수는 없었다. 어찌보면 당시 보급되고 있던 전자지갑을 사용하지 않은게 화근이었다. 나의 자산은 그냥 거래소에 노출되어 있었고.. 사건은 이내 다시 터지고 말았다.

어느날 중국 친구들에게서 메시지가 오기 시작했다. 뉴스 봤냐고? 뭔 뉴스? 중국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외국인의 출금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젠장.. 이건 또 무슨 또라이같은 뉴스래? 언제부턴가 로컬과 외국으로 구분하던 기준은 내국인과 외국인으로 바뀌어 있었고, 난 엄연히 그냥 ‘외국인’일 뿐이었다. 외국인이 로컬쪽 사이트에 가입하였다는 죄로 나의 계정은 그냥 묶여버리고 말았다. 코인도 출금이 되지 않았고 코인을 현금으로 바꿔 인출할 수도 없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은 블록(block)된 상황이었다. 기도 차지 않을 일이었다.

나는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북경에 있는 본사에 전화도 걸어보고, 이메일을 수 차례 보내며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중국 이곳 저곳에 있는 친구들 또한 나의 상황을 회사측에 상세히 얘기하며 분주하게 뛰어 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미안합니다만.. 정부의 방침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업친데 덥친 격으로.. 압수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돌아버릴 일이었다. 나는 일단 코인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이왕 압류를 당한다면 적어도 현금은 그대로 둘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코인을 압류했다는 얘기를 워낙 많이 들어봐서 그랬을까? 나는 현금만은 건들지 않기를 바랬다. 결국 나는 비트코인과 라이트코인의 대열에서 하차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블록된 계정을 풀어주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외국인을 곧 풀어준다는 약속은 다 개소리였다. 그건 그냥 압류였다. 사유재산을 이딴 취급을 해도 되냐는 나의 항변은 허공속에 흩어지는 메아리나 다름 없었다. 그렇게 난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두 번째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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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재기를 꿈꿨다. 일단 메이저 금융권에 진저리가 났다. 펀드매니저란 자격을 유지하느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돈의 세계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이래저래 만만치 않았다. 코인을 다 날리기 전까지는 다 받아낼 수 있었는데 그 이후엔 아무 의미없는 일 같았다. 다시 새로 시작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 직장, 아니 직종을 옮겨버렸다. 사실 중간에 자유스러운 다른 일을 하고 있었는데.. 지인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였다. 어쨌든 새로운 일은 새로운 시작을 하기엔 좋은 점도 있었다.

나는 다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정신적인 안정이 컸다. 일단 몸이 반응했다. 건강을 되찾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즈음에…

스팀잇을 알게 되었다.

비트코인 같은 코인류에 익숙했던 내게 스팀잇은 참 신기한 것이었다. 블록체인 기술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재미삼아 다시 주식을 키워가고 있었는데.. 주식은 걍 냅둬도 알아서 자라려니 하고는 스팀잇 계정을 키우기 시작했다. 일단 여윳돈으로 스팀파워를 쌓아두었다. 내가 간파한 바로는 스팀잇에서 스팀파워의 위력은 생각 이상이다. DPOS라고 그랬나? 결국 POS의 형제일터.. 많이 가진자가 더 유리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맘 같아서는 0하나 더 붙이고 싶었지만 지나친 레버리지는 화가 될 수 있으니 자제하는 것이 맞았다. 나는 계정을 만들고 포스팅을 하기 시작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유저들과 교류를 이어나갔다. 타인의 포스팅을 통해 재미도 느끼고 좋은 정보를 접해나갔다.

그러다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시도해 보기 시작했다. 금융에 익숙했던 나에겐 스팀잇이란 그냥 SNS 공간이 아니었다. 이건 새로운 블록체인판 레고 게임이었다. 가장 먼저 시도해 볼만한 것들이 스팀잇 시스템에 적합한 금융 상품을 만들어 보는 것이었다. 스팀잇에서는 조금씩 시장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미 스팀달러나 스팀 같은 내부 화폐 체계가 구축되어 있으니 쉬 가능한 일이었다. 주고 받고, 빌려주고 갚고, 사고 팔고… 이미 하나의 경제 단위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런 흐름은 매우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는.. 새로운 상품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나름 혁신적인 것처럼 포장된.. 그러나 일견 원리는 이미 작동하고 있는 여러 상품과 비슷한.. 같은 메카니즘을 살짝 비틀어 본 것이었다. 바로..

스달깡이었다.

‘깡’이란 이름을 붙인건 의도적인 면이 컸다. 마치 악동이 된 것처럼.. ‘나는 악동이야!’ 하고 떠들고 다니면 악동도 귀여워 보이는 법이다. 대개 사람들은 애매한 상품에 좋은 이미지와 이름을 붙이곤 한다. 하지만 난 그 반대를 택했다. 안좋아 보이는 이미지를 차용해도 사람들이 그닥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오히려 성공이라 생각했다. 스달깡 사업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사람들의 호응도 괜찮았다. 나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승부를 보려 했다. 스파를 대폭 키우려했던 것이었다. 어차피 잘 될거라면 제대로 하자는 심산이 작용했었나보다. 스파에 0이 하나 더 붙으면 맘껏 제대로 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거란 심산이었다. 나는 대출을 끌어 쓰게 되었고, 지인들에게서 투자를 받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사업은 내가 끌고 간다는 호기에.. 아파트 마저 팔고 말았다. 덕분에.. 0하나 이상의 숫자를 채울 수 있었다. 스달깡은 바야흐로 떠오르는 사업 같았다. 스팀과 함께 말이다…

그러나 희망은 오래 가지 않았다. 플랙을 연타로 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플랙..플랙..플랙.. 이건 플랙을 먹으라는 건지 시험 잘 붙으라고 선물하는 그 뭔가를 먹으라는 건지.. 뭐만 했다하면 플랙이었다. 나는 그 데미지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첩첩산중… 스팀의 하락장이 오고 말았다. 스달깡은 기본적으로 유저들이 보팅으로 페이아웃 시점에 받게 될 스달 보상금을 현가로 즉시 지급해 주는 상품이었다. 헌데 나날이 뚝뚝 떨어지는 스달 가격은 업자 입장에서는 비싼 가격에 지급해주고 싼 가격에 주섬주섬 챙기는 꼴이었다. 거래을 할 때마다 손실이 불어나는 구조가 되고 만 것이었다. 게다가 파워풀한 스파로 현금흐름을 만들어 이자니 할부니 갚아 나가려했던 나의 계획은 다시금 부메랑이 되어 나타나고 말았다. 나는 큰 데미지를 입게 되었다. 그렇게.. 두 번째 파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세 번째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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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나를 버리지 않는 것인가? 나는 어렵사리 기회를 다시를 잡을 수 있었다. 이번엔 이더쪽이었다. 스마트컨트랙트니 Dapp이니.. 전에 스팀잇에 푹 빠져 있을 때는 쳐다보지도 않던 남의 동네 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든 재기를 노려야 하는 상황에서 이것저것 가릴게 아니었다. 기회다 싶은 것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나는 스팀잇에 빠져 있던 마인드를 넓혀 이더 베이스의 흐름에도 주목을 했다. 그리고 이것다 싶은 것이 나오고 말았다. 바로..

크립토키티(CrytoKitties)였다.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기회는 지속되고 있었다. 일단 고양이를 사야했다. 이더를 구매했다. 메타마스크인이지 베타마스크인지 하는 지갑도 깔았다. 거래소에서 이더를 충전했다. 피같은 돈이었다. 쉽지 않았지만 돈을 끌어 모았다. 긁어 모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돈을 빌리는데 자존심 같은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기해야 했다. 크립토키티는 다시 살아나고자 몸부림치는 나에게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그런데.. 젠장.. 구매가 안된다.. 먹통이다.. 트렌젝션이래나 뭐래라.. 스팀잇의 속사포 같은 일처리에 익숙해져 있던 내겐 정말 어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고양이들을 잡아야 했다. 구매해서.. 숫자를 늘리고 비싸게 팔아치워야 했다. 고양이 값은 매일 치솟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기차를 타야했다. 그런데 먹통이라니..

그 순간 손을 잡아 준 사람이 있었다. 내 고양이를 직구로 가져가지 않겠냐고.. 바로 @twinbraid님이었다. 오 마이 갓.. 난 이 분이 이렇게나 고운 심성을 지닌 분인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가 내밀어준 도움의 손길을 잡았다. 간신히 이더를 보내주고 고양이 두 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내겐 천금 같은 고양이였다. 기껏 고양이 두 마리에 눈물이 났다. 왠지 내 인생이 처량했기 때문이었을까? 이제 이 두 마리에 나의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크립토키티에 대한 모든 자료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교배하고 저렇게 팔아치워라. @twinbraid님의 자료는 특히나 바이블이었다. 역시 명석한 사람은 다르구나.. 난 그의 노하우를 씹어 먹듯이 익혀가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지치거나 말거나.. 교배는 계속 됐다. 팔아야 하니까.. 내가 살아야 하니까.. 그리고 틈틈이 시장에서 고양이 시세를 확인했다. 여전히 고양이 가격 상승 일로였다. 수량이 불어나는데 가격까지 오르니.. 내심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Gen0.. 이 녀석만 있으면.. 이 녀석만 있으면 가치는 더욱 뛸 것이었다. 갑자기 내 고양이들이 짜잘해 보였다. 나는 딜을 하기 시작했다. 값싼 두 마리를 팔아 보다 높은 가격의 한 마리를 거두었다. 그렇게 반복을 하다보니 제법 Gen0을 살 수 있는 자금이 모였다. 그리고 어렵사리 Gen0 두 마리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크립토키티의 최고 전성기였다..

가격이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큰 시세 변동 쯤 되는 것이라 여겼다. 헌데.. 킬러앱의 위력은 대단했다. 고양이가 이더의 약점을 드러내다..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안이 있을까? 사람들은 여전히 고양이를 원하지 않겠어? 블록체인에서 이런 게임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헌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이더를 죽인 킬러앱을 다시 죽인건 바로..

SMT였다…

스팀잇에 힘을 빼고 이더를 좇던 내게.. 스팀잇에 새롭게 장착된 SMT는 나의 심장을 겨누고 말았다. 크립토키티? 그딴건 애들이나 주라며 마구마구 앱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속도.. 다양성.. 편의성.. 이건 뭐 게임이 되지 않았다.. 나의 고양이들은? 그냥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애물단지가 되고 만 것이었다.

한 번의 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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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강에 소주 한 병을 놓고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고 인정받으며 살았던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꼬여버린 인생이 되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내 자신의 외침에 내가 대답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시작은 비트코인이었다.. 비트코인, 라이트코인, 스팀, 스팀달러.. 그리고 이더까지.. 막판엔 SMT의 역습에 피를 흘려야 했다. 결국 그놈의 암호화폐가 문제였던가? 내 인생은 그때부터 꼬인 것 같았다. 다 집어치우고 싶었다. 모든 미련을 청산하고 그냥 숨만 쉬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재산을 잃고 빚더미에 오른 나에겐 그것 마저 쉽지 않았다. 그냥 먹고 숨쉬는 것마저 하루하루 버텨나가야 할 새로운 숙제였다. 답이 없었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소주에 취해서였을까? 눈부심에 눈을 뜬건 다음날 아침이었다. 한강에서 부스스 눈뜬 나는 꼬깃꼬깃 접어둔 천 원짜리 지폐로 컵라면을 하나 샀다. 뜨끈한 국물이 해장의 전부였다. 헌데 몸에 온기가 오르니 정신이 새롭게 들기 시작했다. 세 번의 파산.. 그럼에도 건질 인생 교훈이 하나도 없어서야 말이 되겠나 싶었다. 나의 재산와 미래 모든 것이 저당 잡히더라도 정신만은 다시 차려야 했다. 나는 숙고했다. 그리고 흐름을 읽어보았다..

비트.. 라이트.. 스팀.. 이더 스마트컨트랙트.. SMT..

그러면 이 다음은 무엇이지? 이제 기회는 단 한 번? 그 다음에 펼쳐질 기회를 미리 준비하고 힘껏 동승하는 것 외에는 내게 해결책이 없었다. 도서관 컴퓨터 앞에 죽치고 앉아 블록체인의 흐름을 다시 읽어보기 시작했다. 돈되는거라는 욕심을 버리고 이 흐름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떤 문제점을 안게 되었고, 그 해결점을 찾는 과정에서 새로운 흐름을 일으켜가는 역사에 집중했다. 그리고 기술적으로 어떤 부분들이 보안되며 다음 타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지에 주목했다. 그리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다음 주자는..

바로 EOS다!

나는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간의 잘 못 꼬인 인생과 판단 착오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리고 단 한 번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힘을 보태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냉정했다. 한 번 망가진 사람에게 선뜻 기회를 주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마도.. 본인들 삶을 챙기기에도 빡빡한 사정들이 있기 때문일거다. 지금은 그런 때였다. 나 챙기기도 바쁜.. 남의 사정에 귀 기울여 줄 여유가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나는 쓰린 가슴을 안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냥..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을까?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부터? 막막한 일이었다. 찬 물을 한 잔 들이키고 생각을 이어가 보았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글을 쓰는 것 밖에 없었다. 그냥 남겨져 있는 스팀잇 계정에 무언가라도 남기는 것 밖에는.. 비단 보팅 보상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뭐라도 써야했고.. 사람들에게 욕을 먹든 위로를 받든 한 인간으로서 교감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야 사회 속에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는 연어입니다. 연어는 바다로 나아가 힘차게 돌아온다는데.. 저는 모든 것을 잃고 생채기 난 마음으로 이곳에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웃들이 반응해주기 시작했다. 쓴소리도 많았지만 그 보다는 위로글이 더 많았다. 왠지 그런 관심이 힘이 되었다. 그냥 스쳐 지나가며 해준 격려겠지만 나에겐 상처를 보듬어주는 그 무엇 이상이었다. 나는 힘을 내었고.. 조금씩 기운을 되 찾아갔다. 그리고 미친듯이 포스팅에 매진했다. 딱히 다른 할 일도 없었다. 그나마 나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고, 내게 수입을 챙겨주는 고마운 창구였기 때문이었다. 조금씩 스팀과 스달을 모아갔다. 스팀파워을 임대하기 시작했고 명성도를 회복해 나갔다. 조금씩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 주었다. 공감대 형성.. 커뮤니티에서 이보다 더 큰 힘은 없다. 사람들이 나와 함께 같은 마음을 나누어 준 것이다.

글을 쓰지 않는 시간에는 고급 정보를 파악하고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고 보니 블록체인에 관한 고급 정보 중 상당수가 스팀잇 안에 있었다. 시간이 쌓이다 보니 스팀잇은 고급 정보의 보고가 되어 있었다. 역시 EOS에 대한 좋은 공부거리가 넘쳐나 있었다. 아직 시작 단계였다. 조금씩 쌓여가던 스팀과 스달로 EOS 토큰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는지 시세는 어느 선상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꾸준히 글을 쓰고, 사람들과 교감하고.. 보상을 받아 EOS에 투자를 했다. 그리고 공부를 계속했다. 나날이 그러한 반복이었다.

마침 @loteem이 시작되었다. 한국 커뮤니티가 합작해 낸 새로운 작품이다. 무엇보다 상금이 탐났다. 솔직히 내겐 그게 절실했다. 다른 분들에겐 ‘땡큐’겠지만 내겐 ‘오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84회 차에 로팀에 당첨된 것이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냥 우연에 의한 행운이었겠지만 세상이 나를 그리 매몰차게 버리진 않나보다라는 기분때문이었다. 페이아웃 된 후 내 계좌로 송금된 스팀과 스달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평소처럼 그 상금을 보태 EOS를 매입했다. 점점 불어나는 EOS만큼 나의 몸무게는 줄어나갔다. 그만큼 쥐어짰던 것일까.. 내 삶은 그냥 스팀잇.. 그리고 EOS 뿐이었다.

한 해가 지났다.. 개나리가 피고.. 벚꽃이 지고.. 선선한 날씨에 마음도 풀어질 무렵.. 드디어 EOS의 ico기간이 끝났고 말았다. EOS는 토큰이란 허물을 벗어버고 새로운 나비로 탄생하였다. 그리고 시장에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이제는 바야흐로.. EOS 기반의 댑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치 EOS의 탄생을 기다렸다는 듯이.. 세상은 점점 EOS를 둘러싼 환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용자가 주목하고 언론이 주목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기업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기대했던 바대로 시장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EOS의 거침없는 상승이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마침내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연일 이어지는 EOS 폭등에 그간 뿌린 씨앗들이 크나큰 열매가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많은 어려움을 딛고 좋은 종자에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기다려온 농부와 다름 없었다. 그 열매가 얼마나 클 것인지 몰랐고 그 성과는 이미 나의 기대치를 뛰어 넘은지 오래였다. 나는 새로운 자산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하지만 일확천금은 아니었다. 세 번의 파산을 거치는 동안 희망을 끈을 떨치지 않고 줄기차게 걸어온 내 자신에 대한 작은 보상일 뿐이니까 말이다.


이상 긴 소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참고로.. 작자는 파산의 경험이 없음을 알려드리며.. 투자활동에 지나친 몰빵과 부주의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교훈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EOS에 과신은 금물입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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